그리스도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산이나 기리시탄이 순교한 섬을 숭상하면서 신앙을 실천한 취락.
‘히라도의 성지와 취락’은 잠복 기리시탄이 무엇을 숭상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는지를 나타내는 4개 취락 중의 하나다.
금교기 가스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금교 초기에 기리시탄의 처형이 이루어진 나카에노시마 섬을 순교지로 숭상하고, 성수를 취수하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산악불교신앙의 대상이었던 야스만다케 산 등도 함께 숭상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다.
금교령 폐지 후에도 가톨릭으로 복귀하지 않고, 금교기 이래의 신앙을 계속해서 실천했지만, 현재는 개인적으로 신앙의 도구를 모시는 정도가 되었다.
‘히라도의 성지와 취락’은 히라도지마 섬 북서쪽에 위치한 잠복 기리시탄 취락과 그들이 숭상한 산과 섬으로 구성된다. 가스가 취락은 히라도지마 섬 서안에 위치하고 동쪽의 야스만다케 산에서 뻗어 나온 2개의 산등성 사이로 계곡 모양의 지형이 해안으로 이어진 완만한 경사면에 형성된 잠복 기리시탄 취락이다. 가스가 취락에는 그리스도교 전래기의 기리시탄이 매장되어 금교기 이후에 성지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마루오야마 산을 비롯해,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 도구를 구비한 ‘난도가미가 있는 주거’,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가 있다. 가스가 취락과 인접해 있으며 잠복 기리시탄이 함께 숭상하고,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산악 신앙의 장소로 여겨져 온 야스만다케 산에는, 시라야마히메 신사와 그 참배길, 돌 사당, 사이젠지 절터 및 금교기에 관리되고 있었던 산 정상의 자연숲이 있다. 또한 가스가 취락에서 바라보는 해상에는, 금교 초기에 기리시탄의 처형이 시행되어 순교지로서 숭상한 나카에노시마 섬이 있다.
히라도지마 섬에는 1550년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히라도지마 섬 서안지역의 영주인 고테다 일족이 개종함에 따라써 가스가 취락에도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1563년 예수회 선교사의 서간에 의하면 기리시탄의 공동체인 ‘조(組)’가 가스가 취락에 성립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599년 히라도 지방의 영주였던 히라도 마쓰라 일족이 그리스도교를 금했기 때문에 고테다 일족은 히라도지마 섬에서 퇴거했다. 1614년 에도 막부에 의한 전국적인 금교령이 발포된 후에도 선교사는 당분간 국내에 잠입하여, 몰래 히라도를 방문하고 있었지만, 1622년에 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가 순교한 후 그 곳을 방문한 선교사는 없었다. 선교사가 사라진 반면에 가스가 취락에서는 ‘조(組)’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공동체가 유지되고 은밀하게 신앙을 지켜나갔다.
금교기 가스가 취락에서는 잠복 기리시탄이 2개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신앙을 지속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지도자의 주거에는 불단이나 가미다나[신도(神道)의 제단]가 있고, 그 외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 도구(난도가미)를 ‘난도’라고 불리는 방에 감추고, 옥외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산악 신앙의 장소였던 야스만다케 산을 숭상했다.
야스만다케 산은 가스가 취락의 동쪽에 위치한 표고 536m의 히라도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 영역의 넓은 범위에 붉가시나무의 원생림이 남아 있고, 산중에는 시라야마히메 신사와 그 참배길, 산 정상부에는 돌 사당, 사이젠지 절터 등 금교기의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 형태에 관한 유구가 지금도 남아있다. 시라야마히메 신사는 718년에 창건되었고 하쿠산곤겐 이라고도 불렸다. 산 정상에는 근대에 개축한 신전과, 에도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돌 참배길과 도리이가 있다. 신전 뒤편에는 다양한 석조물 군이 보이고 가스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이 ‘기리시탄 사당’이라고 부른 돌 사당도 있다. 참배길에 인접한 사이젠지 절터는 시라야마히메 신사와 함께 창건된 사원터이며, 그 경내에는 건물 초석을 비롯해, 연못, 석조물 등 유구가 남아 있다. 16세기 선교사의 서간에 의하면 사이젠지 절을 중심으로 한 불교 세력이 ‘야스만다케 산’이라고 칭하여 큰 세력을 자랑하고, 선교사들과 적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교기가 되면서 야스만다케 산은 신도(神道), 불교의 신앙의 산으로, 가스가 취락에서도 야스만다케 산 정상을 향해서 참배길이 뻗어 있고 취락 전체 주민이 숭상하는 대상이 되었다. 또 금교기부터 전해졌다고 보이는 잠복 기리시탄의 기도 문구인 ‘가미요세노오라쇼(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에도 야스만다케 산은 ‘야스만다케사마’ 또는 ‘야스만다케노오쿠노인사마’라고 칭하여 야스만다케 산이 잠복 기리시탄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으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히라도지마 섬 북서해안의 앞바다 2km에 위치한 나카에노시마 섬은 동서 약400m, 남북 약50m, 표고 34.6m의 무인도이며, 금교 초기에 히라도 번에 의한 기리시탄 처형이 이루어진 기록이 남아 있다. 나카에노시마 섬은 가스가 취락 등 히라도 서해안의 잠복 기리시탄이 순교지로서 숭상한 장소이며 바위에서 스며 나오는 성수를 취수하는 ‘오미즈토리’ 의식을 행하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렇듯 금교기 가스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산이나 섬을 숭상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다.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의 ‘신도 발견’의 소식은 곧바로 히라도 지방에 전해져 가스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도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스가 취락의 난도가미 중에, 19세기 해외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가톨릭의 신앙 도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취락내의 잠복 기리시탄과 파리 외국 선교회 선교사와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스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금교령 폐지 후에도 가톨릭으로 복귀하지 않고 금교기 이래의 신앙을 계속해서 실천했다. 이윽고 20세기가 되면서 금교기의 신앙 형태는 점차 상실되었고 현재는 개인적으로 신앙의 도구를 모시는 정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