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교기 이주에 의해 취락이 형성되고, 금교령 폐지 후에 ‘잠복’이 끝났음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성당.
‘나루시마 섬의 에가미 취락(에가미 천주당과 그 주변)’은 ‘잠복’의 종언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구성 자산이다.
19세기 소토메 지역에서 각지로 퍼져나간 잠복 기리시탄 일부는 나루시마 섬의 마을에서 떨어진 바다에 가까운 골짜기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은밀하게 지속하고, 금교령 폐지 후는 가톨릭으로 복귀해서 지세에 적응한 에가미 천주당을 세웠다.
에가미 천주당은 주위 자연환경과 동화되어 있으며, 금교기부터 이어진 재래 건축 기술을 사용한 성당의 대표예이다.
나루시마 섬은 고토 열도 중부에 위치한 섬으로, 복잡한 해안선과 급경사면의 산중턱으로 의해 형성되어 있다. 에가미 취락은 나루시마 섬 북서부 서해안의 아주 좁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에가미 천주당은 산골짜기 남쪽 경사면에 평지를 조성해서 세워졌다.
17세기 초두에는 나루시마 섬에 기리시탄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두의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1614년 전국에 금교령이 발포된 후는, 고토 번내의 잠복 기리시탄에게도 탄압이 가해져 18세기경에는 고토 열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본다.
소토메 지역에서 나루시마 섬까지의 잠복 기리시탄의 이주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무인도였던 가즈라지마 섬에 들어가, 그 후 나루시마 섬내의 나가하에, 쓰바키하라, 난고시 등의 지구로 이주했다. 에가미에는 소토메 지역에서 4가구가 이주했다고 한다. 그 이주처의 대부분은 기존의 불교신자 취락에서 격리된 소규모 충적지에 위치하고, 이주자는 평지를 벼농사 땅으로 개간하는 동시에 경사지를 조금 깎아 가옥을 마련하고 취락을 형성했다.
잠복 기리시탄은 산골짜기와 같은 이주처의 지형 지세에 적응하면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신앙을 지속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1873년 금교령 폐지 후 에가미 취락은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하여 과거 지도자의 저택을 ‘가설 성당’으로 하여 신앙의 장소로 이용했다.
1918,년 잠복 기리시탄이 샛줄멸치 어업으로 축적한 자금을 자본으로 해서, 산골짜기에 얼마 되지 않는 평지를 이용해 에가미 천주당을 세웠다. 근처 샘물에 의한 습기에 대처해 바닥을 높히고, 처마뒤에는 장식을 겸한 통풍구를 마련하는 등 에가미 취락 내의 민가와도 공통된 독특한 의장과 구조에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성당은 목조 물막이 판자를 붙인 외벽을 도장해서 부식을 막고 있다.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은 각각 독립된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정면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고, 제단이 있는 뒤편 돌출 부분에는 달개지붕이 마련되어 있다. 내부는 3랑식(廊式)의 평면을 가지고 아케이드, 트리폴리움, 벽부(壁付)의 형태를 갖추고 벽부(壁付) 아치도 있다. 천장은 리브 볼트(Rib vault) 구조이며, 천장 뒤의 지붕 트러스는 킹 포스트 트러스 구조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가미 천주당은 19세기 이후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에서 세워진 수많은 목조 성당 중에서도 가장 다듬어진 의장, 구조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에가미 천주당은 잠복 기리시탄이 이주처로서 선택한 에가미 고유의 산골짜기 지형과 금교기에까지 거슬러 오르는 종래의 건축의장과 공법에 기초를 둔 풍토적 특징, 그리고 신자가 가톨릭 성당으로서 요구한 서양적 특징이 융합되어 있는 점에서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에 세워진 성당 중에서도 ‘잠복’에 전기가 찾아오고 끝을 맞이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