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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자산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

(Ⅲ)잠복 기리시탄의 공동체 유지를 위한 노력


Yuko 환자들의 요양지로 사용되었던 섬에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은 잠복 기리시탄이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장소를 이주처로 선택했는지를 나타내는 4개 취락 중의 하나다. 19세기 소토메 지역에서 각지로 퍼져나간 잠복 기리시탄 일부는 환자 요양지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 가시라가시마 섬을 적당한 이주처로 선택, 불교신자의 개척 지도자 밑에서 신앙을 위장해서 이주하고 은밀하게 공동체를 유지했다. 금교령 폐지 후는 가톨릭으로 복귀하여 금교기의 지도자의 저택 근처에 성당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잠복’은 끝을 맞이했다.

가시라가시마 섬은 고토 열도 북부(‘가미고토’라고 불림)에 있는 주위 약 8km의 작은 섬이다. 소토메 지역의 잠복 기리시탄이 일부러 이주처로 선택한 환자 요양지였던 것을 가리키는 묘지 유적, 이주에 있어서 개척을 지도한 불교신자의 무덤,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 저택터이며 ‘신도 발견’ 후에는 기도의 장소가 된 ‘가설 성당’터와 금교령 폐지 후에 세워진 성당터가 있다.
인접한 가미고토의 주요 섬인 나카도리지마 섬은 급격한 조류가 흐르는 폭 약 150m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산지로 구성된 가시라가시마 섬의 주위는 험난한 해식절벽이 이어지고, 북변부에 유일하게 모래사장 해안이 있다. 그 때문에 가시라가시마 섬은 근세에 있어서도 어업 등으로 일시적으로 이용되는 정도의 고립된 무인도였다. 19세기 중반의 문헌사료에는 환자 요양지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가시라가시마 섬 북변부의 시라하마 취락 해안에서의 발굴조사에서 요양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묘지가 발견되었다.
1858년 가시라가시마 섬의 개척을 목적으로 나카도리지마 섬 아리카와 취락에 살던 불교신자의 마에다 기다유가 이주해서 섬의 북변 해안의 후쿠우라 취락에 주거를 차렸다. 후쿠우라 취락은 가시라가시마 섬 안에서는 비교적 바람이 약하며, 물의 양은 적지만, 강이 흘러 배의 접근이 쉬운 점 등으로 볼 때 섬 안에서는 비교적 생활조건이 좋은 장소였다. 기다유는 해안 가까이에 저택을 마련하고 그 뒤편에 수호신으로서 신사를 모시면서 나중에는 근처에 일족의 묘지도 만들었다.
1859년에는 개척을 위해서 기다유가 모은 몇 가족이 나카도리지마 섬의 다이노우라 취락에서 가시라가시마 섬으로 이주했다. 그 이주자들은 오무라 번과 고토 번의 협정에 의해 소토메 지역에서 나카도리지마 섬으로 이주한 잠복 기리시탄이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불교신자로 위장하여 먼저 살고 있던 불교신자와의 불화를 피해 왔지만, 더욱 안주할 수 있는 땅인 무인도, 가시라가시마 섬을 재이주처로 선택, 기다유와 함께 이주했다고 생각된다.
가시라가시마 섬 북부의 시라하마 해안으로 개척 범위를 확대한 잠복 기리시탄은 해안 뒤편에서 산 중턱 경사면에 걸쳐서 돌을 쌓는 기술을 구사해서 경작지를 개척하고 고구마 재배를 위주로 한 농업을 영위했다.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남해안의 다지리 지구나 서해안의 하마도마리 지구 등 섬 내의 다른 지역에도 거주 범위를 넓히고 새롭게 취락이나 농지를 전개해 갔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나카도리지마 섬에 있는 불교사원에 소속된 불교신자로 위장하는 반면에 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은밀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속하였다.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 선교사와 잠복 기리시탄이 만난 ‘신도 발견’을 계기로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가 은밀하게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접촉을 시작했다. 가미고토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들도 은밀하게 접촉하여 오래동안 숨겨 온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선교사를 가미고토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방문에 따라 가시라가시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도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1867년에는 소토메 지역에서 ‘미즈카타(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를 맡은 인물의 아들이며, 가미고토 지역의 잠복 기리시탄의 우두머리였던, 도밍고 마쓰지로가 가시라가시마 섬으로 이주했다. 그는 섬 내의 시라하마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설 성당’으로 한 후, 오우라 천주당에서 온 선교사를 맞이했다. 그리고 신자는 1887년, ‘가설 성당’ 근처에 목조 성당을 세우고 1914년까지 사용했다. 그것은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에서의 ‘잠복’이 끝을 맞이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1919년에는 마쓰지로의 ‘가설 성당’이 존재했던 곳 근방에 10년의 세월에 걸쳐 현재의 가시라가시마 천주당이 세워졌다. 천주당 건설에는 신자들이 스스로 참여했으며 건축자재는 근처에서 나온 사암을 이용했다. 또한 1905년에는 시라하마 취락의 해안가에 가톨릭으로 복귀한 사람들의 묘지를 형성, 축별(祝別)되었다.

01_頭ヶ島の集落
01_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
01_頭ヶ島の集落
02_白浜集落の発掘写真(1995)
02_시라하마 취락의 발굴 사진(1995년)
02_白浜集落の発掘写真(1995)
03_白浜集落の発掘写真(人骨)
03_시라하마 취락의 발굴 사진(사람 뼈)
03_白浜集落の発掘写真(人骨)
04_福浦集落
04_후쿠우라 취락
04_福浦集落
05_前田家の墓_池田勉撮影
05_마에다 가문의 무덤_이케다 쓰토무 촬영
05_前田家の墓_池田勉撮影
06_前田長平の名が刻まれた墓碑_池田勉撮影
06_마에다 초헤이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_이케다 쓰토무 촬영
06_前田長平の名が刻まれた墓碑_池田勉撮影
07_頭ヶ島由来記が刻まれた墓碑_池田勉撮影
07_가시라가시마 유래기섬으로 )가 새겨진 묘비_이케다 쓰토무 촬영
07_頭ヶ島由来記が刻まれた墓碑_池田勉撮影
08_白浜集落_池田勉撮影
08_시라하마 취락_이케다 쓰토무 촬영
08_白浜集落_池田勉撮影
09_田尻集落の石積みを伴う耕作地_池田勉撮影
09_다지리 취락의 돌을 쌓아 만든 경작지_이케다 쓰토무 촬영
09_田尻集落の石積みを伴う耕作地_池田勉撮影
10_「仮の聖堂」跡を示す石碑_池田勉撮影
10_‘가설 성당’터를 가리키는 석비_이케다 쓰토무 촬영
10_「仮の聖堂」跡を示す石碑_池田勉撮影
11_初代頭ヶ島教会堂跡(現在の頭ヶ島天主堂)
11_초대 가시라가시마 성당터(현재의 가시라가시마 천주당)
11_初代頭ヶ島教会堂跡(現在の頭ヶ島天主堂)
12_カトリックに復帰した人々の墓地_池田勉撮影
12_가톨릭으로 복귀한 사람들의 묘지_이케다 쓰토무 촬영
12_カトリックに復帰した人々の墓地_池田勉撮影

기본정보

Map
문화재 명칭소재지문화재 종목문화재 지정연도
신카미고토쵸 사키우라 돌을 쌓아 만든 취락 경관나가사키현 미나미마쓰우라군 신카미고토쵸국가 선정 중요문화적 경관2012년

오시는 길

가시라가시마 천주당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 인포메이션센터)

※새 창이 열립니다. (‘교통편 참고도’를 참고해 주세요)

UN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