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Ⅱ)잠복 기리시탄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16세기 이후 취락별로 뿌리내린 공동체를 기원으로 하는 ‘조(組)’제도 등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 내부 구조를 변용해 갔다. 이 변용이란, 선교사를 대신해 세례를 행하는 ‘미즈카타(水方)’와 교회력을 관장하는 ‘조카타(帳方)’ 등 역직을 담당하는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교 유래의 의례와 행사 등을 집행하도록 하는 구조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잠복 기리시탄은 이러한 의례와 행사, 신앙에 수반되는 매일의 기도 등을 행할 때 일반 불교도들이 잠복 기리시탄임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신앙 형태를 형성했다. 구체적으로는 ‘히라도의 성지와 취락’처럼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와 불교에서도 성지로 여겨졌던 산이나 기리시탄들이 처형된 섬을 숭상하거나, ‘아마쿠사의 사키쓰 취락’처럼 언뜻 보기에 흔한 생활 속 주변 물건을 신앙의 도구로 대용했다. 또한 ‘소토메의 시쓰 취락’처럼 마리아상 등 그리스도교 유래의 신앙 도구를 몰래 가지고 있거나, ‘소토메의 오노 취락’처럼 기존 신사에 은밀히 자신들의 신앙 대상을 모셔놓고 숭앙하는 등의 방법을 취했다. 18세기가 되자 이전과 같은 대규모의 기리시탄 적발 사건은 나타나지 않게 되는데, 이는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이러한 신앙 형태를 통해 신앙을 숨기는 데 성공했고 이전과 비교해 안정적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방법을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잠복 기리시탄을 단속하던 막부의 노선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약 100년에 걸친 긴 안정기를 지나 1790년, ‘우라카미 이치반 쿠즈레(박해)’가 발생했을 때 에도막부는 고리 쿠즈레(박해)와 같은 심각한 사태로 치닫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라카미의 주민 중에 잠복 기리시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1805년에 발생한 ‘아마쿠사 쿠즈레(박해)’의 경우에도 사키쓰 취락 주민들의 신앙을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이 아니라, ‘다른 종파’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점에서 18세기에는 잠복 기리시탄이 스스로 신앙을 밝히더라도 그 자체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은 막부도 처벌하지 않고 어느 정도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잠복 기리시탄들의 은밀한 신앙 활동과 단속하는 막부의 묵인 사이에 미묘한 균형이 생김으로써, 잠복 기리시탄들은 일본의 전통 종교, 일반 사회와 공생하며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전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단계의 구성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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