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메의 오노 취락’은 잠복 기리시탄이 무엇을 숭상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는지를 나타내는 4개 취락 중의 하나다.
금교기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표면상으로는 불교신자나 취락 내 신사의 우지코[신도(神道)의 신을 모시는 자]로 위장하여 신사에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은밀하게 모셔 숭상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다.
금교령 폐지 후에는 가톨릭으로 복귀하여 ‘소토메의 시쓰 취락’에 있는 시쓰 성당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 후 오노 취락 중심에 성당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잠복’은 끝을 맞이했다.
‘소토메의 오노 취락’은, 니시소노기 반도 서안에 해당하는 소토메 지역에 위치한다. 동중국해와 맞닿은 급경사지에 있으며, 잠복 기리시탄이 우지코[신도(神道)의 신을 모시는 자]로서 신도(神道)의 신자로 위장한 신사,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은밀하게 모셨던 신사,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 금교령 폐지 후에 세워진 성당으로 구성된다.
오노 취락 일대에서는 1571년 예수회 선교사 카브랄 일행의 선교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오노 취락은 오무라 번에 속하는 고노우라 지구의 일부이며,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시쓰 취락과 동일하게 선교가 진행되었다.
1614년 전국에 금교령이 발포되었기 때문에, 오무라 번에서도 지방 영주가 신앙을 버리고 영내에서는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지만,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은밀하게 신앙을 지켜나갔다. 금교가 진행되면서 선교사가 떠나는 한편,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표면상으로는 불교사원에 소속함과 더불어 취락 내에 있는 오노 신사, 가도 신사, 쓰지 신사 세 군데 신사의 우지코[신도(神道)의 신을 모시는 자]로 위장하여 조직적으로 신앙을 지속하였다.
오노 취락 남쪽에 위치한 오노 신사는 세 군데 신사 중에서도 취락 전체의 수호신으로 가장 격이 높은 신사이며, 대대로 쇼야[庄屋, 마을의 정사(政事)를 맡아보던 사람]가 간누시(신사의 관리와 의식을 관장하는 사람)를 맡아보던 신사이며, 주민의 대다수가 그곳의 우지코였다. 그 때문에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도 신사의 우지코로서 신도(神道)의 신자로 위장했다. 또한 보다 가까운 존재였던 가도 신사와 쓰지 신사를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의 장소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은밀하게 제신(祭神)으로 모셔 기도를 드림으로써 신앙을 실천했다. 오노 취락 남서쪽에 위치한 가도 신사에는 원래 다양한 신이 모셔지고 있었지만, 그중에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亂)’때 오노 지구로 도망쳐 온 ‘혼다 도시미쓰’라는 기리시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은 그 제신을 금교 초기에 소토메 일대에서 활동했다고 여겨지는 포르투갈인 선교사와 동명의 ‘산주완’이라고 부르고 몰래 숭배의 대상으로 모셨다. 한편 오노 취락 동쪽 끝에 위치한 쓰지 신사는 예부터 자연 신앙에 기초한 산신을 모시는 신사였지만, 잠복 기리시탄은 그 제신을 가도 신사와 같이 ‘산주완’으로 여기면서 몰래 신앙대상으로 모셨다.
오노 취락에서는 오노다케 산에서 해변부에 이르는 급경사면에 돌을 쌓아 경작지를 만들어,
고구마 중심의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18세기말에는 고토 번과 오무라 번의 협정에 의해 소토메 지역에서 고토까지 개척 이주가 시행되어 그에 오노 취락에서도 이주가 이루어졌다.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에서 선교사와 잠복 기리시탄이 만난 ‘신도 발견’을 계기로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가 은밀하게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접촉을 시작했다. 소토메 지역 잠복 기리시탄도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접촉을 도모하고, 오노 취락 남쪽에 위치한 시쓰 취락에 선교사가 몰래 방문했다. 이에 따라 오노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도 선교사와 접촉하여 많은 마을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쓰지 신사에서 북동쪽 산역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에는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가 있다. 그것은 금교령 폐지 직전에 자신들의 신앙을 표명한 잠복 기리시탄이 취락의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거절당했기 때문에 새롭게 마련한 묘지로, 현재도 13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당초 오노 취락의 가톨릭 신자는 약 3km 떨어진 시쓰 취락에 세워진 시쓰 성당에 다니고 있었지만, 1893년에는 세례를 받은 마을 사람이 200명을 넘었다. 아울러 떨어진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시쓰 성당에 다닐 수 없었던 26가구의 신자를 위해서 1893년 취락 중심에 시쓰 성당의 순회 성당으로서 오노 성당이 세워졌다. 그것은 오노 취락에서의 ‘잠복’이 끝을 맞이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오노 취락에서는 1912년까지 20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 후의 변천에 의해 현재는 가톨릭 신자의 가구수는 점점 감소하여 취락 주민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