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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Ⅲ)잠복 기리시탄의 공동체 유지를 위한 노력


(1/11)그러나 18세기 말이 되면서 오무라 번의 소토메 지역에서는

(2/11)농작물 수확이 많지 않음에도 산아제한을 하지 않는 잠복 기리시탄 특유의 관습으로 인한 인구 증가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3/11)이러한 상황에서 경작민이 필요했던 고토 번은 오무라 번과 협정을 맺고 소토메 지역에서 개척 이민자를 모집하는 정책을 개시했습니다.
(4/11)이로써 소토메 지역의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이 고토 열도와 기타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5/11)그들은 이주를 거듭하며 여러 섬에 잠복 기리시탄 취락을 형성해 갔습니다.

 

(6/11)그들은 기존의 사회, 종교와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여 이주지를 선정했습니다.
(7/11)번의 목장터를 재개발할 필요가 있었던 섬 (구로시마 섬의 취락(구성 자산7))으로 이주한 것을 비롯해
(8/11)신도(神道)의 성지였던 섬 (노자키지마 섬의 취락터(구성 자산8))
(9/11)환자들의 요양지로 사용되였던 섬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구성 자산9)),
(10/11)번의 정책에 따라 섬의 미개척지 (히사카지마 섬의 취락(구성 자산10))로도 이주했습니다.
(11/11)잠복 기리시탄들은 이주지의 사회, 종교와 공생하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신앙을 지속하는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일본의 전통 종교 및 일반 사회와 공생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켜가기 위해 전통을 형성한 잠복 기리시탄은 18세기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이 되자 잠복 기리시탄 취락이 있던 니시소노기 반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오무라 번의 소토메 지역에서는 경사면이라는 지형 조건의 제약으로 농작물 수확이 많지 않았음에도 종교상의 이유로 산아제한을 하지 않았고, 이에 따른 인구 증가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7년, 인구가 적어 경작민이 필요했던 고토 번이 건너편의 오무라 번과 협정을 맺고 소토메 지역에서 개척 이주민을 모집하는 정책을 개시했다. 이로써 소토메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고토 열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 중에는 잠복 기리시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이주를 거듭하며 고토 열도 등 여러 섬에 잠복 기리시탄 취락을 형성해 갔다.

이주할 때 소토메 지역 출신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이주지의 사회, 종교와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여 이주지를 선정했다. 번의 목장터를 재개발할 필요가 있었던 구로시마 섬으로의 이주를 비롯해, 신도(神道)의 성지였던 노자키지마 섬, 환자들의 요양지로 사용되었던 가시라가시마 섬, 번의 정책에 따라 미개발지였던 히사카지마 섬으로도 이주하여 취락을 형성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주지를 선정함으로써 잠복 기리시탄들은 이주지의 사회, 종교와 공생해 가며 그들의 공동체 아래에서 신앙을 지켜갈 수 있었다. (‘구로시마 섬의 취락’, ‘노자키지마 섬의 취락터’,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 ‘히사카지마 섬의 취락’)

이 단계의 구성 자산

  1. 01_黒島の集落

    7구로시마 섬의 취락

    히라도 번의 목장터를 재개발한 지역으로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2. 01_野崎島の集落跡

    8노자키지마 섬의 취락터

    신도의 성지였던 섬으로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3. 01_頭ヶ島の集落

    9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

    환자들의 요양지로 사용되었던 섬에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4. 01_久賀島の集落

    10히사카지마 섬의 취락

    고토 번의 정책에 따라 섬의 미개발지에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5. 01_奈留島の江上集落

    11나루시마 섬의 에가미 취락(에가미 천주당과 그 주변)

    금교기 이주에 의해 취락이 형성되고, 금교령 폐지 후에 ‘잠복’이 끝났음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성당.

UN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