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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자산

구로시마 섬의 취락구로시마 섬의 취락

(Ⅲ)잠복 기리시탄의 공동체 유지를 위한 노력


Yuko 히라도 번의 목장터를 재개발한 지역으로 개척 이주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한 취락.

‘구로시마 섬의 취락’은 잠복 기리시탄이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장소를 이주처로 선택했는지를 나타내는 4개 취락 중의 하나다. 19세기 나가사키 지방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일부는 구로시마 섬의 목장터 재개발을 위해서 이주가 장려되고 있는 것을 알고, 기존의 취락과 공존할 수 있을 만한 장소로서 선택, 이주하여 표면상으로는 소속하고 있었던 불교사원에서 마리아 관음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은밀하게 공동체를 유지했다. 금교령 폐지 후는 가톨릭으로 복귀하고, 섬 중심부에 성당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잠복’은 끝을 맞이했다.

구로시마 섬은 규슈 북서부 사세보시의 서방 해상에 떠있는 주위 약 12km의 작은 섬이다. 소토메 지역에서 이주한 잠복 기리시탄이 재개척하고 밭으로 만든 목장터, 겉으로는 불교도로 위장하여 몰래 마리아 관음을 안치하고 예배드린 불교사원,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의 저택터,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 에후미(성화 밟기)가 시행된 관공서터, 금교령 폐지 후에 세워진 성당터로 구성된다.
구로시마 섬에서는 16세기 후반에 방일한 선교사의 활동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그리스도교의 전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가 되면서 구로시마 섬에는 히라도 번의 목장이 설치되었지만, 19세기 초두에는 폐지되었다. 그 후 목장터의 재개발을 고안한 히라도 번이 개척민 유치 정책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거기에 응해서 소토메 지역 등에서 구로시마 섬에 이주한 개척민이 19세기 중반에 걸쳐 새롭게 7개의 취락을 섬내에 형성했다. 개척민 중에는 소토메 지역 출신의 많은 잠복 기리시탄이 포함되어 있어, 새롭게 형성된 7개의 취락 가운데 히카즈, 네야, 나키리, 다시로, 와라베, 도도비라 여섯 취락은 잠복 기리시탄의 취락이었다.
구로시마 섬에 이주한 잠복 기리시탄은 이주에 의해 섬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세기 초두에 지어진 혼무라 취락의 고젠지 절에 소속되어 표면상으로는 불교신자로서 행동했다. 구로시마 섬에서는 매년 혼무라 취락의 혼무라 관공서[구로시마 섬을 관할하는 히라도 번의 출장 관공서로 이용되고 있었던 쇼야(庄屋, 마을의 정사(政事)를 맡아보던 사람)의 저택]에서 잠복 기리시탄을 단속하기 위한 ‘에후미(성화 밟기)’가 시행되어 잠복 기리시탄은 그리스도 또는 성모 마리아상을 밟을 수 밖에 없었다.
고젠지 절 본당에는 관음보살입상을 성모 마리아상으로 여긴 ‘마리아 관음’을 몰래 안치하여 사원에 참배하는 것으로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마리아 관음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구로시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이 표면상으로는 불교신자로 위장하는 한편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속한 것은, 언뜻 보면 불교신자의 묘지로 보이지만, 사실은 묘석의 방향이나 매장의 방법이 불교식과는 다른 독특한 장송의례를 적용한 묘지를 형성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 선교사와 잠복 기리시탄이 만난 ‘신도 발견’을 계기로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가 은밀하게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접촉을 시작했다. 구로시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도 몰래 접촉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금교 정책 아래의 구로시마 섬에서 행하여 온 세례 방법이 무효하다는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새롭게 교리 지도를 받게 되면서, 금교령 폐지 직전 1872년에 구로시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은 모두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복귀 당초는 과거 지도자의 집 등 섬 내 두 곳을 ‘가설 성당’으로 했다. 그중 한 곳이 히카즈 취락에서 대대로 ‘미즈카타(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를 맡은 데구치 가문의 저택이었다. 이윽고 새로운 성당을 건설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1879년에 각 취락에서 편의성이 좋은 섬 중앙부에 초대 구로시마 천주당이 세워졌다. 그것은 ‘구로시마 섬의 취락’에서의 ‘잠복’이 끝을 맞이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1902년에 신축된 현재의 구로시마 천주당에서는 지금도 지난 날의 에후미(성화 밟기)를 속죄하는 기도를 매주 드리고 있으며, 금교기의 기억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01_黒島の集落
01_구로시마 섬의 취락
01_黒島の集落
02_本村集落
02_혼무라 취락
02_本村集落
03_根谷集落
03_네야 취락
03_根谷集落
04_蕨集落
04_와라베 취락
04_蕨集落
05_本村役所跡
05_혼무라 관공서터
05_本村役所跡
06_興禅寺_池田勉撮影
06_고젠지 절_이케다 쓰토무 촬영
06_興禅寺_池田勉撮影
07_興禅寺の梵鐘 (潜伏キリシタン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
07_고젠지 절의 범종(잠복 기리시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07_興禅寺の梵鐘 (潜伏キリシタン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
08_興禅寺のマリア観音(現存しない)
08_고젠지의 마리아 관음(현존하지 않음)
08_興禅寺のマリア観音(現存しない)
09_仕切牧墓地
09_시키리마키 묘지
09_仕切牧墓地
10_出口家の屋敷跡_池田勉撮影
10_데구치 가문의 저택터_이케다 쓰토무 촬영
10_出口家の屋敷跡_池田勉撮影
11_初代黒島教会堂跡(現在の黒島天主堂)
11_초대 구로시마 천주당터(현재의 구로시마 천주당)

 

11_初代黒島教会堂跡(現在の黒島天主堂)

기본정보

ガイドマップA ガイドマップB
Map
문화재 명칭소재지문화재 종목문화재 지정연도
사세보시 구로시마 섬의 문화적 경관나가사키현 사세보시국가 선정 중요문화적 경관2011년

오시는 길

구로시마 성당(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 인포메이션센터)

※새 창이 열립니다. (‘교통편 참고도’를 참고해 주세요)

UN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