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카지마 섬은 고토 열도 남부에 위치하고, 북쪽에서 중앙부를 향해서 굽어 든 히사카 만을 중심으로, 산지가 말굽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주위 약 52km의 섬이다. 잠복 기리시탄이 개척 이민 정책에 따라서 개척한 수전, 불교신자와 협동하여 어망을 감아올리는 작업을 한 물레터,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 ‘신도 발견’ 후 탄압의 장소, 금교령 폐지 후에 세워진 성당과 그 터가 있다.
고토 열도에서의 본격적인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1566년 예수회 선교사 알메이다에 의해 히사카지마 섬 남측에 인접한 후쿠에지마 섬에서 시작되었다. 히사카지마 섬에서의 선교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록은 없지만, 북쪽에 인접한 나루시마 섬에는 17세기 초두에 이미 기리시탄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두에 걸쳐 후쿠에지마 섬과 나루시마 섬 사이에 있었던 히사카지마 섬에도 그리스도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8세기경에 고토 열도에서 실시된 철저한 금교 정책에 의해 기리시탄은 일단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무렵 히사카지마 섬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당시의 히사카지마 섬 인구는 456명이고 히사카, 오비라키, 이노키, 이치코기, 와라비 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전부 농업에 적합한 평지에 입지한 취락이었다. 한편 해변에는 섬의 출입구였던 다노우라 포구 외 소금을 만드는 요(窯)농민이 있었던 후카우라 등의 어촌취락이 있었다. 그 취락의 주민은 전부 불교 신자이며 다노우라 취락에 세워진 고토 번의 대관소(후에 히사카 취락에 이설)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오무라 번에서 고토 번으로 농민의 이주 협정이 성립된 1797년 이후, 고토 열도의 각지에 ‘이쓰키’라고 하는 개척 농민의 취락이 형성되었지만, 그 대부분이 잠복 기리시탄의 취락이었다. 히사카지마 섬에서는 대관소의 허가 아래, 기존의 불교취락의 가장자리에 있는 에이리, 우치카미히라, 소토카미히라, 불교취락에서 격리된 장소에 있는 고린, 자자레에 잠복 기리시탄의 이주 취락이 형성되었다. 에이리, 자자레, 오비라키, 하마도마리, 고린 각 취락에는 금교기에 만들어진 잠복 기리시탄의 묘지가 지금도 남아있다.
잠복 기리시탄의 이주처는 전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토지였으며 자력으로 개간하기에는 이주자의 수가 부족했다. 그 때문에 잠복 기리시탄은 불교신자의 수전 옆에 새로운 수전을 개척하거나, 불교신자가 하는 농어업 등에 부속하는 각종 작업을 도와주는 등 불교신자인 섬 주민들과의 사이에 일종의 상조관계를 구축하면서 생활·생업을 영위했다.
이와 같이 히사카지마 섬에 이주한 잠복 기리시탄은, 이주처의 불교 취락의 주민과 상조관계를 쌓는 반면에 취락마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은밀하게 잠복 기리시탄으로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에이리 취락에서는 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가 대대로 계승한 중국제 백자 관음상을 성모 마리아 상으로 여긴 ‘마리아 관음’에게 몰래 기도를 드렸다.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에서 선교사와 잠복 기리시탄이 만난 ‘신도 발견’을 계기로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가 은밀하게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접촉을 시작했다. 히사카지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도 은밀하게 접촉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교리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와의 접촉을 계기로 히사카지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은 공연하게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게 되었기 때문에, 1868년에 고토 열도 일대에서 ‘고토 쿠즈레(박해)’라고 하는 대규모 적발 사건이 일어났고, 좁은 감옥에 다수의 신자가 감금되어 많은 사망자를 낸 ‘로야노사코 사건’이 발생했다. 히사카지마 섬은 1873년 금교령 폐지 직전에 잠복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가해진 최후의 현장이 되었다. 로야노사코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는 순교자를 애도하기 위한 성당과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한 히사카지마 섬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지금도 금교기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이다. 금교령 폐지 후 히사카지마 섬의 잠복 기리시탄은 가톨릭으로 복귀하고 하마와키, 에이리, 자자레, 아카니타의 각취락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것은 히사카지마 섬의 각 취락에서의 ‘잠복’이 끝을 맞이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아울러 히사카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초대 하마와키 성당은 히사카지마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고린 취락에 이축되어 구 고린 성당으로서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