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라 천주당’은 무엇을 계기로 ‘잠복’이 끝났는지를 나타내는 구성 자산이다.
일본의 개국에 따라 방일한 선교사와 잠복 기리시탄은 2세기만에 오우라 천주당에서 만났다(‘신도 발견’).
그 후에 계속되는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와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취락 지도자와의 접촉에 의한 전기가 찾아와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사람과, 계속해서 금교기의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 신도(神道)나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으로 갈라지고 ‘잠복’은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우라 천주당’은 나가사키 지방의 남부, 나가사키 항과 맞닿은 언덕에 있으며, 역대 신부가 거주한 주교관, 당초 거류지의 외국인을 위해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 금교령 폐지 후의 선교를 위해서 세워진 신학교 및 전도사 학교의 한 무리 건축물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과거 오우라의 외국인 거류지안에 있으며, 개국에 따라 1862년에 파리 외국 선교회의 퓌레 신부가 나가사키에서의 선교 거점으로 정한 장소다.
경지에는 먼저 1863년에 신부가 거주하는 주교관이 세워지고, 이어서 1864년에 오우라 천주당이 건설되었다. 3개 탑이 있는 고딕풍의 외관으로, 정면 상부에는 불교사원에 걸려있는 편액과 같이 ‘천주당’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며, 내부는 3랑식(廊式)의 구조였다. 천주당은 16세기 나가사키에서 순교하여 1862년에 열성(列聖)된 일본 26 성인에게 바쳐져, 그들의 순교지인 니시자카의 방향을 향해서 세워졌다.
1865년의 낙성식 직후에 나가사키 우라카미 마을의 잠복 기리시탄 십 수명이 오우라 천주당을 방문하여, 그중 한 사람이 프티장 신부에게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신부님과 같은 마음입니다’라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른바 ‘신도 발견’이라고 불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즉시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지도자는 잇따라 오우라 천주당을 방문해서 선교사와의 접촉을 시작했다.
선교사와의 접촉은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취락에 새로운 신앙의 국면을 초래했다. 선교사의 지도 아래로 들어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공연하게 신앙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867년 에도 막부는 우라카미의 잠복 기리시탄을 검거하였고, 금교 정책을 이어받은 메이지 정부도 3,000명 이상이나 되는 잠복 기리시탄을 국내 20개 번으로 유배를 보냄과 동시에 배교하도록 고문했다. 이것이 ‘우라카미 욘반 쿠즈레(박해)’다. 고토에서도 신앙을 표명한 잠복 기리시탄을 검거한 ‘고토 쿠즈레(박해)’, 히사카지마 섬에서는 약 200명의 잠복 기리시탄을 불과 6평(약 20m2)짜리 감옥에 투옥시켜 많은 사망자를 낸 ‘로야노사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탄압에 대하여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는 재일 영사에게 요청해서 사태 수습에 노력했다. 1873년 해외 각국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메이지 정부가 드디어 금교령을 철폐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탄압정책은 끝이 났다.
그리스도교 금교령 폐지에 따라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은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가 16세기에 전해진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사람, ‘가쿠레 기리시탄’과 같이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금교기의 신앙 형태를 유지하는 사람, 신도(神道)나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 등으로 각각 갈라졌다.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는 잠복 기리시탄이 16세기 이래의 신앙과 함께 계승해 온 라틴어나 포르투갈어 유래의 ‘기리시탄 용어’를 비롯해 잠복 기리시탄이 전사(傳寫)해 온 교리서 등을 중시하고 가톨릭으로 복귀한 신자들을 극진하게 지도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한 새로운 채색 판화 등도 제작했다. 한편 잠복 기리시탄이 독자적으로 신앙을 계속해 온 방법에 대하여는 가톨릭으로서의 수정을 도모해 갔다.
오우라 천주당에서는 금교령 폐지 후에 증가하는 신자에 대응하기 위해서 증축이 이루어져, 1879년에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경내에는 일본인 사제와 전도사 육성의 장소로서 각각 라틴신학교, 전도사 학교가 세워졌다. 라틴신학교는 1875년에 창설되어 1879년에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은 일본인 사제로서 각지에 파견되었다. 전도사 학교는 선교사가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취락을 널리 순회하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에, 선교사 대신 교리를 전하는 전도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1883년경에 창설된 것이다. 1892년까지 많은 일본인 전도사가 배출되었고 교리 지도를 위해 각지로 파견되었다. 라틴신학교나 전도사 학교는 전기를 맞이한 잠복 기리시탄의 가톨릭 복귀를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