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I)선교사의 부재와 기리시탄 ‘잠복’의 계기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보급
15세기 중엽에 시작된 포르투갈의 세계 진출은 15세기 말에 이르자 아시아에 도달했다. 포르투갈 국왕의 요청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도 활발해졌는데 이러한 활동은 인도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1549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중국 선박을 통해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그 후 하비에르의 뒤를 이어 선교사들이 차례차례 일본으로 건너와 그리스도교를 널리 알렸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전파함에 있어 우선 영주(다이묘)에게 가르침을 설해 불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뒤, 그들을 통해 휘하의 가신과 영지의 백성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주가 개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예물을 바치고 무역을 알선하며 다이묘의 가신과 영지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단기간에 많은 개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규슈 지방 영주(다이묘)들의 상당수가 포르투갈 선박과의 무역(남만 무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선교사의 활동을 받아 들였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귀의하게 된 자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불렸으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고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지원했다. 규슈 지방의 주요 기리시탄 다이묘로는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하라 성을 축조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등이 알려져 있다. 1588년에 아마쿠사 지방의 영주가 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또한 기리시탄 다이묘 중 한 명이었다.
선교사들은 규슈와 야마구치 지방에 이어 기나이(畿内)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실시하여 그리스도교는 각지로 퍼져 나갔다. 머지않아 기리시탄 다이묘의 영지였던 아리마, 오무라, 아마쿠사 각 지방을 시작으로 신도들의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이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교 선교 초기,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해 포교를 주도하고 기리시탄의 신앙을 강화,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 기반의 강도는 후일 선교사 및 일본인 사제가 부재하는 상황에서도 잠복 기리시탄들이 신앙을 지켜가는 데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규수, 야마구치 지방 및 기나이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가 전개되는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란 속에서 일본을 통일했고, 선교사와 기리시탄 다이묘의 결속이 강해져 영지를 양도하는 등 바람직하지 않은 움직임이 발각되자 1587년, 하카타(후쿠오카)에서 선교사를 추방한다는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선포하고 예수회에 기진된 나가사키를 몰수해 자신의 직할지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선교를 금지하는 방침을 내리면서도 무역에 의한 이윤 획득을 중시하여 남만무역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바테렌 추방령’은 철저히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596년에 일어난 스페인 선박의 표류 사건을 계기로 선교사가 스페인 영토 확대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에 격분하여 1597년, 기나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6명을 포함해 총 26명의 기리시탄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른바 ‘일본 26성인 순교’ 사건이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에도 초기부터 일본으로 건너 온 예수회 선교사들에 이어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들도 일본으로 건너와 각 회파간의 일본 선교활동이 격렬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잡고 1603년에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초기에는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무역을 지속하기 위해 선교사의 그리스도교 선교활동 및 일본인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묵인했다. 이로 인해 기리시탄이 증가해 17세기 초반 최전성기의 신도 수는 37만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금교 정책의 본격화, 그리고 잠복
1614년, 에도막부는 정권의 완전 장악을 건 오사카 도요토미 가문과의 전투에 앞서, 막부 내부의 권력투쟁을 배제하고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봉건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전국에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내렸다. 선교사는 마카오나 마닐라로 추방되었고 성당은 파괴되었다. 일본 국내 기리시탄 중 다이묘들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고 다시 불교로 개종하였고, 휘하의 무사들도 기리시탄임이 막부에 밀고당하는 것을 우려해 차례로 배교하였다. 그러나 선교사 중에는 일본 국내에 잠복하는 자를 비롯해 추방된 후 재차 일본으로 잠입하여 은밀히 기리시탄을 지도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에도막부는 선교사의 잠입을 막부에 밀고한 자에게 포상을 내렸고, 더 나아가 선교사가 체포된 경우에는 그들을 숨겨준 자들까지도 고문한 뒤 처형했다. 1622년에는 나가사키에서 구금된 사제와 수도사, 그들을 숨겨준 일본인 기리시탄 등 총 55명이 화형해 처해지거나 참수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겐나의 대순교’이다.
당초 일반 백성은 밀고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막부는 밀고 대상을 점점 확대함과 동시에 기리시탄 색출을 강화하고 신앙이 발각된 자들에게는 혹독한 고문을 가해 배교를 강요했다.
일찍부터 선교 거점이자 주민 대부분이 기리시탄이었던 나가사키시 내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신앙 규제가 없었으나, 1626년에 나가사키 부교로 부임한 미즈노 모리노부(水野守信)와 뒤이어 1629년에 부임한 다케나카 시게요시(竹中重義)는 주민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금교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배교 혹은 순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금교령이 선포된 이후 에도막부의 탄압 아래 일본에서는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전국의 다이묘 및 그 휘하의 무사들 등의 지배층이 먼저 신앙을 버렸고, 그 뒤를 이어 일반 백성들이 배교하였다. 한편 과거 선교의 거점이었던 나가사키 주변부 및 이전부터 기리시탄이 융성했던 일본 각지의 취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후 형성된 민중 차원의 공동체가 은밀히 유지되어 신앙이 이어졌다.
쇄국의 확립과 공동체의 붕괴,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에서의 존속
각지에서 엄격한 금교 정책이 실시되고 있던 1637년, 영주의 폭정과 기근을 계기로 아리마 영지와 아마쿠사 지방에서는 백성들에 의해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이 일어났다. 시마바라 지방 남쪽에 위치하고 일찍이 그리스도교가 번성했던 아리마 영지에서는, 영주였던 기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뇌물수수 사건으로 유형을 당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에 따라 그 적자인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휴가 지방으로 영지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많은 기리시탄 무사들은 영지 내에 남아 영지의 백성들과 함께 기리시탄으로서의 신앙을 지속했다. 아리마 가문의 옛 가신들과 예전 아마쿠사 지방을 지배했던 기리시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옛 가신들이 주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은밀히 계속하고 있던 시마바라, 아마쿠사 지방의 주민 약 2만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나 당시 사용되지 않고 있던 ‘하라 성터’에서 농성을 벌였다. 4개월에 걸친 공방 끝에 봉기 세력은 막부군에 의해 거의 전원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이 봉기 이후, 막부는 하라 성터가 재차 반란이나 봉기의 거점이 되는 것을 우려해 성터를 철저히 파괴했다.
기리시탄이 일으킨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으로 그리스도교를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한 에도막부는 1639년, 선교사가 밀입국을 꾀할 가능성이 있는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하고 한 세기 가까이 유지해 온 포르투갈인과의 무역관계를 단절했다. 이른바 ‘쇄국’이라 불리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유럽과의 교역은 선교사에 의한 선교활동의 우려가 없는 프로테스탄트(신교) 네덜란드로 국한되었으며 교역 창구도 히라도에서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이전되었다.
금교 정책 아래 각지에서 몰래 신앙을 이어가던 자들(잠복 기리시탄)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한층 더 강화되어 에도막부는 성화상이나 메달 등의 신앙 도구를 밟게 하는 ‘에후미(絵踏)’를 시행하고 ‘고닌구미(五人組)’ 제도를 도입하여 밀고 대상을 일반 백성으로까지 확대해 잠복 기리시탄을 적발하고자 했다. 또한 모든 백성들에게 불교로 귀의할 것을 강요하고 사원의 단가로서 ‘슈몬 아라타메초(宗門改帳)’에 종파 및 소속 사원을 기재한 뒤 그들을 사원의 관리 하에 두었다. 그 결과 1617년에서 1644년 사이에 75명의 선교사와 1,000명이 넘는 잠복 기리시탄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642년과 1643년에는 둘로 나뉘어 일본에 밀입국하고자 했던 10명의 선교사가 체포되는 등 에도막부의 선교사 배제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1644년에는 결국 마지막 선교사였던 고니시 만쇼(小西マンショ)가 순교했다. 이로써 일본에는 선교사가 부재하게 되어 그 이후 잠복 기리시탄은 약 2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신앙을 은밀히 지속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상황에서도 몰래 신앙을 지켜가고자 했던 잠복 기리시탄 백성들이 17세기 중반까지 일본 각지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7세기 후반 ‘(오무라)고리 쿠즈레(박해)’, ‘분고 쿠즈레(박해)’, ‘노비 쿠즈레(박해)’로 일컬어지는 대규모 잠복 기리시탄 적발 사건이 각지에서 잇달아 발생했던 점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적발 사건으로 많은 지역에서 잠복 기리시탄의 명맥이 끊겼으나 18세기에 들어서도 취락별로 잠복 기리시탄 공동체가 남아 있던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일찍부터 선교의 거점과 그 주변 지역이었던 곳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선교사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기에 각 취락에 견고한 공동체 기반이 갖추어져 있던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이었다.
이 단계의 구성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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