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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Ⅳ) 선교사와의 접촉에 의해 맞이한 전환기와 ‘잠복’의 끝


(1/18)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일본 개항 후 머지않아 건설된 오우라 천주당에서 선교사와 재회합니다.

(2/18)1865년에 나가사키, 우라카미 마을의 잠복 기리시탄 십여 명은 오우라 천주당 (구성 자산12)을 찾아가 신부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3/18)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잠복 기리시탄은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4/18)각지의 공동체 지도자들은 선교사와 접촉하여 자신들이 행해왔던 세례의 유효성과 교리의 정당성을 확인했습니다.
(5/18)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같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서로 대립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6/18)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간 사람들이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하자 메이지 정부도 이를 묵인하기 어려워졌습니다.
(7/18)그 결과 잠복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다시금 강화되어
(8/18)대규모의 적발 사건이 다수 발생했습니다.
(9/18)그러나 서양 각국의 강력한 항의가 빗발치자 1873년, 메이지 정부는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철폐하였습니다.
(10/18)이로써 잠복 기리시탄은 선교사의 지도 하에 가톨릭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사람,
(11/18)계속해서 취락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제까지 지켜왔던 잠복 기리시탄 유래의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
(12/18)이제까지 지속해 온 신앙을 떠나 신도(神道), 불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13/18)가톨릭으로 복귀한 사람들은 예전 지도자의 가옥 등을 ‘가설 성당’으로 삼아 기도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14/18)그 후, 그들은 각 취락에 소박한 목조 성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15/18)선교사의 지도 하에 많은 성당이 취락의 중심지나 순교 등이 일어났던 장소에 세워졌고
(16/18)얼마 지나지 않아 벽돌과 콘크리트 등 서양 유래의 건축재료 및 공법을 사용해 재건축되었습니다.
(17/18)한편, 금교 정책 시기에 기원을 둔 전통적인 재료와 공법을 이용하여 지역 풍토에 맞게 설계된 성당도 남아 있습니다.
(18/18)이러한 성당들은 가톨릭으로 복귀하면서 약250년간 이어진 잠복 기리시탄 전통이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들은 일본이 개항함에 따라 일본에 온 선교사들이 세운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에서 약 2세기만에 선교사와 재회했다. 1865년,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마을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오우라 천주당을 찾아가 선교사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신도 발견’이라 일컬어지며 이로써 잠복 기리시탄은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지도자들은 은밀히 오우라 천주당을 찾아가 선교사와 접촉하여 선교사가 부재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행해왔던 세례의 유효성과 교리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각 취락들은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갈 것인지, 약 2세기 반에 걸쳐 유지해 온 신앙 방식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지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였고 시쓰 취락의 ‘노나카 소동’처럼 같은 취락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서로 대립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에도막부의 방침을 계승한 메이지 정부가 금교 정책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잠복 기리시탄들이 공공연하게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자 단속을 담당하는 정부도 더 이상 이를 묵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결과 다시금 잠복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어 ‘우라카미 요반 쿠즈레(박해)’, ‘고토 쿠즈레(박해)’와 같은 적발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잠복 기리시탄 탄압에 대해 서양 각국이 강력히 항의했기 때문에 1873년, 드디어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금교령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잠복 기리시탄은 선교사의 지도 하에 가톨릭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사람,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취락 내의 신앙 지도자를 중심으로 여태까지 지켜온 잠복 기리시탄 유래의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가쿠레 기리시탄), 여러 갈등 끝에 지금까지 이어온 신앙을 떠나 신도(神道)나 불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사람 등으로 갈라졌다.

선교사의 지도 하에 들어가 가톨릭으로 복귀한 잠복 기리시탄들은 예전 지도자의 가옥 등을 ‘가설 성당’으로 삼아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했다. 많은 취락에서 금교 정책 시기에 다수 존재했던 공동체가 통합되어, 새로이 설치한 ‘가설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한편, 취락 내에 다수 존재했던 ‘가설 성당’의 형태 등을 통해 금교 정책 시기의 공동체 단위를 계승하면서 가톨릭 교리를 따르는 취락이 존재했다는 점도 밝혀지고 있다.

1865년에 일어난 외국인 선교사와의 재회로 인해 잠복 기리시탄들은 가톨릭으로의 복귀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이어온 신앙 형태의 유지, 그리고 신도나 불교로의 개종이라는 여러 선택지 중 서로 다른 길을 찾아가야  하는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로써 일본 전통 종교, 일반 사회와 공생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잠복 기리시탄의 전통은 변용해 가는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73년에 그리스도교 금교 정책이 철폐된 후 가톨릭으로 복귀한 옛 잠복 기리시탄들은 ‘가설 성당’ 등을 기도 장소로 사용하다가 1880년대 중반부터 각각의 취락에 소박한 목조 성당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성당들은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존재이면서 2세기 이상 이어진 금교 정책 시기에 형성, 확산된 잠복 기리시탄 신앙의 전통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많은 성당들은 선교사의 지도 아래 취락의 중심지나 순교 등이 일어난 기념해야 할 장소에 세워졌고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벽돌과 콘크리트 등 서양에서 유래한 건축자재 및 공법을 사용하여 재건축되기도 했다. 한편, ‘나루시마 섬의 에가미 취락 (에가미 천주당과 그 주변)’의 에가미 천주당처럼 금교 정책 시기에 기원을 둔 전통적인 재료와 공법으로 습기를 예방하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계절풍을 막는 등 지역의 풍토에 맞추어 설계된 성당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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